저 앞에서 좌회전해서 가는 게 더 빠릅니다.”

.”

좌회전 깜빡이 소리가 체 3번 울리기도 전에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애들은 선생한테도 바락바락 대든다고 하대. 근데 애들 인권이니 뭐니 때문에 선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러니까 애들이 점점 더 삐뚤어지지.”

남자는 또 요즘 애들 타령이었다. 자기 자식은 범주에서 빠진 요즘 애들이야기였지만 그 조차도 건너 들은 게 전부였다.

강자와 강자를 강자로 만들어 주는 약자는 언제나 있었다. 머리를 맞는 애와 가슴을 치는 애, 담배를 피우는 애, 여자를 만나는 애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존재했다.

그냥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알고 보면 그 자식도, 그 자식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편협된 누군가에게는 요즘 애들이었다.

없던 관심을 억지로 끌어내고 아는 척하고 싶은 욕망으로 뒤덮인 어른이 요즘 애들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 강자 편에 섰거나 약자를 약자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탰거나, 그저 방관했거나. 남의 아픔을 지나가는 계절쯤으로 여겼던 대다수 사람에게 요즘 애들은 옛 기억을 감출 피신처에 불과했다.

 

저 앞 신호에서 우회전해서 쭉 직진하면 됩니다.”

미터기 요금이 막 만 원을 넘자 남자가 이전과는 다른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혼자만의 대화가 싫증이 났는지 핸드폰을 살짝 들여다봤다가 이내 덮었다. 정장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또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신호가 걸리자 카드를 꺼냈다.

그러다 또 남자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가을은 가을이네.”

 

놈들 중 몇 명은 일찌감치 하복을 벗고 춘추복을 입었다.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땐 볼품없어 보이던 춘추복도 소수가 입을 땐 달라 보이는 게 학교였다. 놈들은 그 시선을 즐겼고 시스템 안에 있지 않음을 과시했다.

나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침이면 빵을 데웠고 매 순간 놈들 눈치를 살폈다. 쉬는 시간이면 심부름을 했고 점심때엔 놀잇감이 됐다.

교실 한쪽에서는 고등학교 진학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성적이 좋은 애들은 벌써 다른 도시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간인 애들은 몇 군데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놈들은 다 함께 갈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그 계획 속에 나도 포함해 있다는 게 섬뜩할 뿐이었다.

놈들에게는 새로운 놀이가 필요했다. 매일 먹는 빵은 물렸고 안마는 예전처럼 시원하지가 않았다. 탈출구를 찾은 건 나처럼 얼굴이 까만 놈이었다.

인마 이거 싸우는 거 한번 보고 싶지 않나.”

남자랑 붙이면 무조건 진다.”

맞은 게 있으니까 맷집은 좀 될걸?”

맞는 건 잘하는 데 칠 줄을 모른다 아이가.”

그래서 어쩌자고.”

걔 있다 아이가. 여자 꼬봉. 걔랑 붙이면 될 거 같은데. 내가 여자애들한테 말할게.”

놈들은 새 놀이에 큰 관심을 보였다. 까만 놈이 앞장서 여자 무리와 얘기를 나눴고 곧 모든 놈들이 만족할 만한 소식을 들고 왔다.

금마 무리도 재밌어하더라. 수요일 마치고 보기로 했다. 치마 말고 체육복 바지 입히고 온다더라. 먼저 세 대 맞고 나서 하기로 했다. 인마 설마 쓰러지겠나.”

잘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며 놈들이 내 등을 토닥거렸다. 어떤 놈은 맷집이 부족하다며 가슴을 쳤고 다른 놈은 특훈이라도 해야 한다며 쫑알거렸다.

상대는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을 했었던 여자아이였다.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렸던 여자아이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가장 밑바닥으로 떠밀렸다. 같은 옷을 자주 입고 구멍 난 양말을 한 번 신었다는 게 이유였다.

중학교에 온 이후 빵을 데우러 갔던 매점에서 몇 번 마주쳤지만 인사를 한 적은 없다. 축 처진 어깨, 한숨,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다리, 헝클어진 머리가 나를 보는 듯해 싫었다. 허겁지겁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는 뒷모습도 역겨웠다. 내 뒷모습이 저렇진 않을까 두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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