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대로 세 대 먼저 맞고 시작하자. 근데 인간적으로 얼굴은 때리지 말자.”

알았어. 벌써 몇 번이나 얘기해뒀다. 쟤나 중간에 발끈하지 말래.”

까만 놈과 여자 무리 대장이 이야기를 나누고서 놈들이 바라던 경기가 시작했다. 장소는 후미진 골목, 양측 선수는 맷집이 좋기로 소문난, 키 작은 꼬봉과 구멍 난 양말 소유자였다.

경기 시작. 여자애는 오른 주먹을 쥐더니 내 오른쪽 가슴을 쳤다. 아프지 않다. 내 아픔 정도를 모두 알아차렸는지 야유가 쏟아졌다.

두 대밖에 안 남았다.”

니 그러다가 나중에 터진다. 칠 수 있을 때 세게 쳐라.”

여자애가 다시 한 번 오른쪽 가슴을 쳤다. 전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 주먹에 나도 모르게 ''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쪽에서는 박수 소리, 다른 쪽에서는 그것도 못 참느냐는 욕이 들렸다.

아픔이 분노로 바뀐다. 놈들에게 수없이 맞을 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올라왔다. 여자애에게 울분을 토하고 싶어졌다.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않았던, 나와 같은 처지였던, 이 자리에 투견처럼 끌려왔던 아이인데, 내 분노는 오롯이 여자아이에게 향했다.

살짝 빗나간 마지막 주먹은 어깻죽지를 때렸다. ‘씨발.’ 내가 뱉은 욕에 놈들은 환호했다. 곧이어 이제 세 대 끝났으니 너도 공격하라는 말이 뒤통수를 때렸다.

나는 여자애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간 오른손으로 복부를 쳤다. 여자아이에게서 '' 하는 신음이 나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왼발로 여자아이 정강이 쪽을 걷어찼다. 여자 꼬봉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쓰러진 여자아이는 내 쪽으로 팔을 몇 차례 휘저었지만 맞을 리 없었다.

여자아이 손을 발로 밟고 나서도 분노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주저앉은 여자아이를 발로 한 번 더 찰까, 손으로 머리를 때릴까 하는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잘한다, 저 새끼 맷집 키운 보람이 있네, 다음에는 남자 놈하고 한 번 붙여보자, 저 새끼 여자 때린다는 비아냥이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저놈들이 깐 판에 꼭두각시처럼 놀아나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나를 덮친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리 없었다. 여자애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죽여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죽도록 패고 싶었다.

한 번 더 걷어차려는 내 몸짓에 여자애는 몸을 잔뜩 웅크리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저 새끼 저러다가 사람 잡겠다.”

우리가 이겼네. 그만.”

놈들 중 한 놈이 나를 제지했다. 여자 무리는 벌레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눈물과 먼지 범벅이 된 여자 꼬봉은 힘겹게 일어나더니 말 한마디 없이 무리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여자아이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그냥 걸어만 갔다. 아무도 여자아이를 잡지 않았다.

여자 무리는 재밌었다라는 말만 남기고 우리가 왔던, 여자아이가 향한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놈들은 나를 둘러싸고 쓰레기니, 승리자니, 첫 승을 했다느니 온갖 욕과 칭찬을 동시에 쏟아냈다. 까만 놈은 벌써 다음 상대를 잡겠다며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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