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끝자락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나조차도 모르는 곳으로 소리 없이 도망쳤다. 과거를 지우고 기억을 지웠다.

놈들이 날 찾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놈들은 집요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예전과 같은 세력을 과시할 수 없게 된 놈들에게 내 존재는 금방 잊혔다. 밑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르며 겁냈을 테고 새로운 세력에 빌붙고자 사방을 뛰어다녔을 테다. 그게 놈들 습성이었다. 한두 명만 있을 때는 놈들도 그저 그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다시 깨달았다.

 

남자가 흐릿하게 보일 때쯤 나는 P에 있던 기어봉을 D로 옮기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정처 없이 흘러오다 잡은 운전대는 뜻밖에 내게 잘 맞았다. 운전대 쪽으로 바짝 당긴 운전석 의자나, 유독 꼿꼿이 세운 등받이가 동료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그게 편했다.

남자가 내린 아파트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 대학가가 있었다. 2분을 달려 도착한 대학가 택시 정류장에 차를 세우고 다시 10분쯤 기다렸을까, 젊은 커플이 탔다.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주세요.”

“네.”

미터기를 켜기 전 운전석을 앞으로 좀 더 당겼다. 등받이를 더 꼿꼿이 세웠다. 의지와 나는 이제 거의 한 몸이 됐다. 이제 나를 때릴 순 없었다. 가슴을 맞을 일도, 누가 뒤통수를 때리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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