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제사상에서 할아버지를 열다섯 번째 마주하던 그해. 할아버지 사진을 마주한 찬욱은 익숙함에 접어뒀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우리 할아버지가 경찰이랬지'라며 중얼거리던 찬욱은 처음으로 할아버지 사진을 꽤 오래 봤다. 사진 속 할아버지는 30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리가 안 된 눈썹은 꽤 진했다. 눈매 끝은 살짝 올라가 있었고 전체적으로 눈은 가로로 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콧대였다. 빛바랜 흑백사진이었으나 높은 콧대는 뚜렷하게 남았다. 찬욱은 문득,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이 '양키'로 불린다는 걸 떠올리곤 ''하고 혼자 웃었다.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보던 찬욱은 애써 외면하던 생각마저 불러왔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며 찬욱을 괴롭혔던 그것은 그토록 자랑스러웠던 할아버지 직업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경찰이었을까.'

찬욱은 왜 이 생각을 하게 됐는지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찬욱이 자라면서 역사를 알게 되고,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그때 시대를 이해하게 된 게 영향을 미친 듯했다. 찬욱이 늘 떠올렸던 낭만적인 그 경찰과 당시 시대가 어울리지 않다고 느낀 것이다.

어쩌면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경찰'에만 너무 집착했던 탓일 수도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 하나면 충분했는데, 이제는 그것밖에 안 남았다. 몰라서 병이 된 셈이었다.

찬욱은 아빠에게 슬쩍 물어볼까 하다, 이내 접었다. 사실, 이제 그게 뭐 중요할까 싶었다. 어디가 자랑할 일도 없고,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익숙함에 무관심을 더할 차례였다.

 

찬욱은 할아버지를 지운 듯 잊은 듯 살았다. 매년 가을 의무적으로 한 번씩 떠올렸다가도, 계절이 바뀌기 전에 잊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경찰이 되겠다는 생각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몸 쓰는 것보단 앉아서 공부하는 게 스스로 더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다. 누구를 쫓고 잡을 만큼 튼튼하지도 않았고 예전처럼 달리기를 잘할 자신도 없었다.

찬욱은 당연하듯 변화에 적응했다. 그리고 무심하게 시간을 보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다소 아쉬운 수능 성적을 들고 어부지리로 들어간 대학도 무리 없이 마쳤다.

그 사이 할아버지와 만남은 눈에 띄게 줄었다. 시험 기간이라는 핑계로, 아프다는 핑계로, 용돈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고향 집 내려가기를 미룬 탓이다. 벌초며, 명절 차례상이며 할아버지를 떠올릴 일은 틈틈이 있었으나, 할아버지 얼굴을 마주하진 못했다. 1년에 한 번, 그 가을 제사상을 지나친다면 할아버지를 딱히 볼 일이 없었다.

 

찬욱이 서른세 번째 가을을 맞이한 그해. 어릴 적 그때처럼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던 찬욱은 잊은 듯 살았던 기억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는 진짜 경찰이셨어요?"

옆에서 '내가 맞니, 네가 틀렸나' 재잘되던 누나들이 없었기에 저녁 식사자리에는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누나들을 대신해 소주잔이 자리를 채웠으나, 서먹함을 풀기에는 아직 그 양이 부족했다.

찬욱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뜻밖에 꽤 감성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2년이 조금 넘는 연애 끝에 결혼까지 바라보게 된 찬욱은 문득 '내 뿌리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찬욱이 아빠가 됐을 때, '뿌리'를 묻는 자식들 앞에서 어버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찰이 아니고 맞고는 이제 상관없었다. 그냥 내가 알던 그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던 그 할아버지가 실재하는지 알아야 했다.

찬욱의 물음에 아버지는 예전처럼 말이 없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너희 할아버지 예전에 경찰이라고 했잖아"라며 거들었으나, 아버지는 대답 대신 소주잔만 만지작거렸다.

"예전에는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까 이상하더라고요. 그때 그런 경찰이 있었는가 싶기도 하고. 나중에 저도 애 낳으면 증조 할아버지가 이랬다, 할아버지는 이랬다 제대로 가르쳐 줘야지요."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찬욱 말에 찬욱의 어머니가 웃었다. '결혼하기 전에 별걱정은 다한다'며 찬욱을 놀리던 어머니는 이내 찬욱 아버지를 쏘아붙였다.

"애가 궁금해 하는데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줘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더구먼."

계획에 없었던 합동작전이 있어서일까, 그사이 취기가 올라서일까. 말없이 있던 찬욱의 아버지가 입을 뗐다.

"느그 아빠가 평생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소가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짧은 말을 내뱉고서 소주를 한잔 들이키는 찬욱 아버지 눈에 추억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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