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들은 불쌍한 영혼이 깃든 다섯 명을 일렬로 세웠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가야 한다며 다섯 명을 다그친 이들은 앞뒤로 복동 무리를 감싸고 걸음을 재촉했다.

거친 숨소리와 낙엽 소리, 가끔 시시덕거리는 남자들의 웃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섬진강을 지나온 이곳은 어디일까. 가보면 안 다던 이들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복동은 걷고 또 걸었다. 복동은 목적지인 그곳에서 재조사가 이뤄진다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도 품었다. 분명한 것은 복동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었고 그 누구보다 떳떳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복동의 말만 들어준다면, 충분히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복동은 아직 덜 자란 맏이와 건부가 보고 싶었다. 핏덩이 같은 막내도 생각났다. 여전히 아버지의 품이, 어깨가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부족했다. 아비로서, 제대로 해 준 것도 없었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모든 걸 주고 싶었다.

 

. 가장 선두에 섰던 남자가 개머리판으로 둔탁한 무언가를 치는 소리였다. 복동이 생각건대, 그건 바위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신호처럼 들렸다.

시커먼 남자들은 복동 무리에게 그대로 무릎 꿇으라고 소리쳤다. 트럭에 처음 오를 때부터 총구가 늘 복동 무리를 향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모두가 순순히 말을 들었다.

이제부터 저들이 뭘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이라도 보이게 했으면 좋겠다만, 저들은 아직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사이 복동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들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배움이 부족해 좌파며 우파며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가장이다, 낮에는 허드렛일을하고 밤에는 주점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시답잖은 인간일 뿐이다. 착오가 있는 듯하니 다시 한번 확인해달라.'

 

복동은 당장에라도 손을 번쩍 들어 결백함을 쏟아내고 싶었으나 일단은 참았다. 저들이 아무리 흉악하더라도 한 번쯤은 말을 걸어주리라 믿었다.

말이 없던 시커먼 사내들이 입을 연 건 복동 옆에 있던 남자가 울부짖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제발 살려 달라'는 남자 외침에 복동 가슴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때를 기다려야겠다는 복동도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놈입니다. 집에 처자식이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수 십 번씩 정리했지만 소용없었다. 복동은 미친 듯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보이지 않는 그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울고 소리치고. 땀 냄새와 침 냄새, 오줌 냄새까지 뒤섞인 이곳, 여긴 지옥과 같았다. 벗어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평범한 아버지로, 남편으로 살 수 있을까.

그 순간, 복동 무리를 겨누고 있던 총에서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달라고. .

1948년 음력 1028. 차디찬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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