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1

"우리할아버지는경찰이셨습니다."

올망졸망한 입으로 쉼 없이 말하는 목소리가 꽤 우렁차다. 솜씨는 조금 떨어져도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지키는, 동네 미용실에서 자른듯한 바가지 머리가 목소리와 묘하게 어울려 웃음을 자아낸다.

초등학교 2학년인 된 찬욱이 숙제를 받은 건 일주일 전이다. '내 뿌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이 붙은 A4 용지에는 할아버지 성함은 뭔지, 연세는 어떻게 되는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하시는 일은 뭔지 등을 알아 오라고 적혀 있었다. 혹시 돌아가셨다면 부모님을 따라 성묘 간 추억 등을 적어도 된다는 친절함도 잊지 않았다. 물론 숙제 종이를 나눠주기 전, 아직 어린아이 다루기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담임선생은 '뿌리'라는 단어가 지닌 다양한 뜻을 한참이나 설명해야 했지만.

찬욱과 달리기 실력이 비슷한, 앞자리에 앉은 민기에게 숙제 종이를 넘겨받았을 때 찬욱은 싱숭생숭했다. 찬욱이 할아버지를 본 건 사진이 전부였다. 제사상에 오른, 젊었을 적 사진이었는데 큰고모가 '사진 속 할아버지와 찬욱이 똑 닮았다'며 몇 번이고 말했던 게 생생하다. 큰고모는 부리부리한 눈이 똑같다고 했지만, 찬욱이 보기에는 하나도 닮지 않았었기에 할아버지 얼굴은 금방 잊었다.

 

찬욱은 할아버지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만난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었기에 애초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지난해 명절이 끝나고 학교에 왔을 때 '할아버지에게 세뱃돈 얼마를 받았다'는 친구들 말이 사뭇 부럽기도 했지만, 또 그러려니 했다. 보지도 못했으니 많이 서운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찬욱은 이번 숙제를 받고 남몰래 떠올려 봤다. 할아버지가 멋진 일을 했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면 그것만큼 멋진 일도 없었다. 세뱃돈을 2만 원 더 받는 것은 한두 번 자랑하고 나면 시시해지기 마련이었다. 학기 초 세뱃돈을 많이 받았느니, 적게 받았느니 하며 다투던 친구들도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어울려 놀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했던 일이 주는 의미는 사뭇 달랐다. 그건 언제든지 자랑할 수 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 방학이 와도 할아버지가 멋진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200원짜리 불량식품과 달리, 할아버지 자랑은 돈이 들지도 않았다.

 

"엄마, 우리 할아버지는 뭐하던 사람이었어요?"

숙제를 받은 그 날 오후, 찬욱은 A4 용지를 내밀며 물었다. 찬욱 물음에 '갑자기 그건 왜'라는 표정을 잠시 짓던 엄마는 찬욱이 내민 종이를 훑더니 이내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이건 엄마보다는 아빠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나중에 아빠 오시면 물어보자. 엄마가 알기에는 할아버지는 멋진 일을 한 사람이셨대."

찬욱은 안도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우리 할아버지는 멋진 일을 했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아빠가 들려줄 아빠의 아빠 이야기도 궁금했다. 결혼은 언제 했는지, 아빠는 언제 낳았는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자랑거리가 수북했다. '초코파이'를 사 오겠다던 지난주 금요일만큼이나 찬욱은 아빠를 기다렸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기다리길 한 시간.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온 아빠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찬욱은 참았던 질문을 쏟아냈다.

"아빠 근데 우리 할아버지는 뭐 하는 분이셨어요?"

'아빠 다녀오셨습니까', '인사부터 해야지'라며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있던 누나들 말과 찬욱 질문이 뒤섞여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찬욱 엄마가 상황을 정리했다.

"학교에서 숙제를 받았나 봐요. 일단 밥부터 먹고."

 

밥 한술 뜨고 아빠 얼굴 보고. 오매불망 기다리는 찬욱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말이 없었다.

"바보야 할아버지는 선생님이랬어", "아니야, 옛날에 그냥 농사지으셨다고 했어"라며 한참이나 티격태격 되던 찬욱 누나들이 지칠 때쯤, 아빠는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찬욱이 할아버지는 경찰이었어. 오래전에, 그러니까 아빠도 어렸을 적에 나쁜 사람들 잡으러 갔다가 다쳐서 돌아가셨고."

찬욱은 기뻤다. '역시 우리 할아버지는 멋진 일은 했던 사람'이라는 감탄사를 몇 번이고 내뱉었다. 찬욱이 보기에 경찰만큼 훌륭한 사람도 없었다. 책에서, TV에서 보던 경찰은 늘 듬직했고 건강했다. 달리기는 찬욱보다 훨씬 더 빨랐고, 힘은 만화 속 주인공만큼이나 세 보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경찰은 인기가 많았다. 도둑을 잡고,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는 경찰은 친구들이 되고 싶은 어른으로 늘 손에 꼽혔다.

'우리 할아버지가 경찰이라니'라는 말을 신나게 내뱉은 찬욱은 곧바로 책상으로 뛰어갔다. 찬욱은 서툴지만 빠른 손놀림으로 숙제 종이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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