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를 몇 대 더 맞고 나서야 나는 홀로 남을 수 있었다. 한쪽에 내려놨던 가방을 둘러메고도 한참을 서 있던 나는 여자아이가 갔던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어디라도 숨고 싶었지만 어디에 숨어야 할지 몰랐다. 뭐라도 해야 했지만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이 드문 길만 돌고 돌았던 그 오후, 나는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용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저기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 주면 됩니다.”

옷을 고쳐 입은 남자는 좌석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카드를 내밀었다. 남자의 정장만큼 깔끔한 영수증이 나왔다. 11,000원. 남자가 중간에 알려준 길 덕에 빨리는 왔지만 평소보다 1,000원이 빠졌다. 아쉬워도 별수 없었다. 이 불경기에 20분 가까운 거리를 택시로 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남자 말에 제대로 대꾸라도 했다면 1,000원이 빠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도 잠시 스쳤다.

남자는 카드를 되돌려 받기 전에 차 문을 열더니 내 손에서 카드를 받자마자 차에서 내렸다. ‘수고하셨다’라는 말이 문 닫는 소리에 묻혔다.

급하게 닫은 차 문틈에 정장 윗옷이 끼일 만도 하건만 몸에 딱 맞는 남자 정장은 그런 불상사를 막았다. 정차해둔 차 옆으로 남자가 지나갔다. 남자가 입은, 조금은 작아 보이는 정장은 사뭇 위태롭기까지 했다. 남자가 말한 요즘 애들 옷과 똑 닮아 있었다.

 

여름 방학만큼이나 긴 겨울이 다가올 때쯤, 나는 철저히 겁쟁이가 되기로 했다. 아버지에게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 대신 곧바로 사회에서 기술을 배우겠다고 했다. 어디든, 뭘 배우든 상관없었다. 그게 놈들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죽을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도망이라도 쳐야 했다. 공부는 싫다고, 내 성적을 보면 알지 않느냐며 몇 날 며칠 아버지를 설득했다.

완강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니 요즘 별일 없느냐”라고 묻더니 “별일 없다”라는 내 대답을 듣고 나서 허락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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