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놈은 어느새 거짓말쟁이가 됐다. 내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던 놈이 나란히 서서 맞길 몇 차례. 키 큰 놈은 더는 놈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피지와 콜라가 잔뜩 쌓은 탁자 위로 키 큰 놈 이야기가 겹쳤다.
‘그 새끼는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라고, ‘진작에 빼고 가야했다’라는 말이 나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겉으론 우정, 우정을 외치던 놈들이었지만 눈 밖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버렸다. 같이 지각하고 같이 욕하고. 집에 좀 더 늦게 들어가고 더 친한 척하고. 무리를 벗어나는 순간 적이 되는, 그게 이놈들 방식이었다.
피자 몇 판이 더 올랐고 콜라가 추가됐다. 아버지는 나중에 고등학교 가서도 친하게 지내라는 말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노래방 가서 놀고 오라며 5만 원을 더 쥐여줬고 언제든지 집에 놀러 오라는 말도 했다. 아버지가 가고 나서 그날 내 귀에 들린 건 노랫소리 반, 가슴을 치는 둔탁한 마이크 소리 반이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땐 참 얌전했거든. 사춘기 들어서 키가 부쩍 크더니 학교에서 힘도 좀 쓰고 그랬는가 봐. 지금은 벌써 180 다 돼가는데 훤칠해.”
신호가 바뀌자마자 남자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남자는 자신이 모 중견기업 부장이라 했다. 부서 회식이 있었고 꼰대 소리가 듣기 싫어 2차를 계산하고 먼저 일어나는 길이라 으스댔다.
내 반응이 신통찮았는지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 아들 친구들이 영 엉망인가 봐. 같이 몇 번 몰려다니더니 사고를 치더라고. 그래도 자기는 가만히 옆에만 있었대. 친구들이 후배들 때렸는데 옆에 있다가 괜히 같이 혼난 거지. 고등학교, 대학교 가고 나면 다 뿔뿔이 흩어질 놈들이 지금은 그렇게 죽고 못 사는가 봐.”
“네.”
“그래도 이놈이 워낙 착해서 거짓말을 못 해요. 친구들이랑 논다고 학원을 빠진 적이 있었는가 학원 원장한테 전화가 오더라고. 저녁에 집에서 모른 체하고 몇 번 캐물었더니 금세 사실대로 대답을 하고. 엄마 닮아서 그런가 착해.”
“아. 네.”
그 시절 나는 철저히 거짓말쟁이였다. 선생님을 속였고 아버지에게 아무 일 없다는 말만 늘어댔다.
‘괜찮아’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갑작스러운 주먹에 숨이 턱 막혀도, 눈물이 찔끔 흘러도 언제나 괜찮아가 먼저 튀어나왔다. 말을 잘 들으면, 잘 참으면 그놈들이 기특해할 줄 알았다. 체벌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날 줄 알았다.
-계속-
'이서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받이] (4) (0) | 2019.02.25 |
---|---|
[등받이] (3) (0) | 2019.02.24 |
[등받이] (1) (0) | 2019.02.21 |
[라디오 재구성] (35) 2017년 8월 첫째 주 (0) | 2018.10.29 |
[라디오 재구성] (34) 2017년 7월 셋째 주 (0) | 2018.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