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말은 맞았다. 트럭 짐칸에 초췌하게 웅크린 아빠는 건부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됐다. 얼마나 울고, 얼마나 소리쳤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나중에 들은 누나 말로는, 트럭을 쫓아 뛰어가던 건부는 두 번이나 넘어져 양쪽 무릎이 다 까졌다고 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가던 트럭은 경찰서 앞을 지나가자 속도를 냈고 건부와 누나는 더는 따라가지도 못했다. 섬진강을 향해 난 길, 평소 같았으면 가장 신나는 얼굴로 걸었을 그 길이 그날은 그렇게 무서웠다.

 

건부는 한동안 아침마다 아빠를 찾았다. 엄마에게 묻고, 누나에게 아빠를 찾으러 가자고 보챘다. 하지만 전쟁을 겪고 10살을 넘기고 자신이 가장임을 알아가면서 건부는 더는 누나를 보채지 않았다.

사람들 기억 속에서도 건부 아버지는 서서히 지워졌다. 전쟁의 화마가 온 나라를 덮쳤었던 그 시절, 부모가 없다는 건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돌보는 게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건부는 고등학교 진학고 포기하고 곧장 일을 시작했다. 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친구에게 싼값에 산 낡은 자전거가 건부 발이 되고 가장 큰 재산이 됐다.

그 무렵, 이따금 건부는 아버지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다가 한 번씩 젊을 적 경찰이었던 동네 어른들을 찾아 아버지가 묻힌 장소라도 가르쳐 달라며 물었다. 늘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였지만 건부는 몇 번이고 찾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아버지가 묻힌 곳에 막걸리 한 잔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건부의 소박한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흔까지 세 살을 남겨둔 1980,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싣는 건부 앞으로 건장한 남자 네 명이 다가왔다. 건부는 며칠 전 친구 상은이 한 말을 곧바로 떠올렸다.

 

'조심해라. 우리 같이 가진 거 없고 빽도 없는 놈들만 골라간다더라. 걔들 보기에 우리는 그냥 사회악이고 폭력배나 비슷한 거지. 밑에 놈들은 위에서 까니까 실적 올려야 한다고 두 눈 부릅뜨고 있고. 아무나 데려가는 거야. 명분이야 좋지. , 마음, 정신을 맑게 한다나 뭐라나. 천국같이 편안한 사회를 만든다나. 근데 가면 그냥 바보 돼서 온다더라. 매일 일하고 맞고. 조심해. 니는 느그 아버지 일도 있다 아이가.'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사내들은 건부를 몰아세웠다.

"1943년생 이건부, 사회 교화 대상이다. 타라."

다른 설명도 없었다. 그들은 강압적이었고 막무가내였다. 검은 선글라스 안에 눈을 감추고 있었지만, 건부는 그 눈이 분명히 교활할 것이라 장담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마냥 끌려갈 순 없었다. 아버지 삶을 되풀이할 순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고등학교도 안 가고 줄곧 일만 하고 있습니다. 내년에 결혼할 여자도 있습니다. 게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한 번만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착오, 고등학교, , 결혼. 뜻밖에 그들이 반응을 보인 건 홀어머니였다. 당장에라도 건부를 잡아갈 듯하던 그들은 잠시 자기네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건부와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남자는 혼잣말로 '홀어머니'를 반복했고, 다른 남자는 건부를 한참이나 위아래로 훑어봤다. 또 다른 남자는 몇 장의 서류를 보더니, 건부의 말이 사실이라고 확인시켜줬다.

양조장 안쪽에서 김 영감이 뛰어나온 것도 이때다. 눈치 빠른 김 영감은 단번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놈 말이 다 맞습니다. 홀어머니 모시고 살고 막걸리 배달하는 그냥 착한 놈입니다. 워낙 심성이 착해 제가 중매를 선 적도 있습니다. 한 번만 다시 확인해 주시고, 넘어가 주십시오."

김 영감의 애원에 남자들도 다시 자기네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들 상황은 '어차피 이달 할당량은 다 채웠다'는 말을 끝으로 매듭지어졌다.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 조용히 살아."

차가운 말 한마디를 남기고 그들이 떠나자 건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김 영감은 '다행이다', '잘했다'며 건부 어깨를 토닥거렸지만 건부의 떨리는 심장을 멈추지는 못했다.

 

멀어져 가는 남자 무리를 보며 건부는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나는 언덕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선 안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건부가 지우려 하면 할수록 아버지 얼굴은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축 처진 어깨와 가려진 두 눈, 묶인 두 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순식간에 건부 머릿속을 메웠다. 아버지는 어디 계실까. 아버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도대체 왜 그렇게 끌려갔을까. 건부는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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